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데사 백국 (문단 편집) === [[안티오키아 공국]]과의 다툼 === 그가 에데사를 비운 몇 년 동안 백작의 자리는 보에몽의 노르만 친척들이 전부 집어먹고 있는 상황이었다. 탕크레드는 백국을 돌려줄 생각이 없었으므로 보두앵을 쫓아냈고, 그는 겨우 겨우 자신을 따르는 수백 명의 기사들과 함께 요새 도시 투르베셀로 도망쳤다. 탕크레드는 투르베셀로 육박하여 포위를 준비하였다. 핀치에 몰린 상황에서 도움의 손길이 그에게 다가왔다. 가톨릭 교회의 지도자들이 십자군 국가끼리서의 내전을 막기 위해 탕크레드와 보두앵의 평화 협상을 제안한 것이었다. 협상은 투르베셀에서 열렸지만, 이미 우세한 편이었던 탕크레드가 물러설 리가 없었으므로 결론은 지지부진했다. 실질적인 지원은 [[아르메니아]]와 [[동로마 제국]]에서 왔다. 보두앵의 우방인 아르메니아 영주 바일이 미약하게나마 수백 명의 지원군을 파병했고, 킬리키아에서 탕크레드가 힘을 쓰는 것을 억제하고 싶었던 동로마의 지방 영주이자 세바스토스였던 [[램프론의 오신]][* 그도 토로스처럼 아르메니아계 동로마인이었다.]도 [[페체네그]] 기병대 300명을 그에게 지원했다. 세 군대가 안티오키아 공국을 압박하자 탕크레드도 버티지 못하고 가톨릭 교회의 중재안을 받아들였다. 보두앵은 결국 1108년 9월 18일에 4년간의 포로와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백작으로 돌아왔다. 그는 자왈리와의 약속을 지켜 지금까지 잡아들인 무슬림 포로들을 모두 방면하고 에데사 부근에서 [[모스크]]를 지을 수 있게 해 주었으며, 기독교로 개종해 무슬림들을 살해했던 배교자들을 이슬람교도 손에 넘겨주어 처분했다. 자왈리는 약속을 성실히 지킨 그가 마음에 들었다. 마찬가지로 보두앵을 위해 인질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조슬랭도 비록 이교도이지만 믿을만 하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자왈리와 보두앵은 곧 동맹을 맺게 되었다. 둘의 동맹은 주변의 영주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특히 자왈리와 사이가 좋지 않던 [[알레포]]의 아미르 라드완과, 보두앵과 겨우 몇주 전까지 전쟁상태였던 [[안티오키아 공국]]의 탕크레드가 바로 그랬다. 결국 둘은 공동의 적인 자왈리와 보두앵을 견제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고, 자왈리가 알레포를 침공하자 서로의 동맹을 지원하기 위해 출동한 에데사의 기사들과 안티오키아의 기사들이 서로 전투를 벌이는 기괴한 장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전투에서 안티오키아 공국은 에데사와 자왈리의 군대를 대파하고 두 군대를 투르베셀로 도망치게 만들었다. 그 전투는 워낙 치열해서 에데사 성내에서는 보두앵이 죽은 것으로 착각해 섭정단을 꾸리기까지 하는 상황이었다. 이 상황을 보다못한 상위 군주인 [[예루살렘 왕국]]의 [[보두앵 1세]]는 두 군주를 예루살렘 교회의 이름으로 소집하여 순례자의 산에서 중재시켰다. 보두앵 왕은 탕크레드에게 갈릴레아 공작령을 하사하는 대신 에데사를 포기하라고 명령했다. 탕크레드는 그 명령에 마지못해 복종했다. 보두앵 2세는 왕의 도움을 받은 대가로 [[트리폴리]] 공성전을 지원하였고. 결국 1109년 4월경에는 탕크레드도 자신의 영지로 떠나고, 트리폴리 시도 십자군에게 함략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